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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에세이]"목적지에 대해" 걸었다. 어깻죽지 위에서는 묵직한 짐 꾸러미가 발바닥의 마찰을 더했다. 앞에는 볼을 애며 지나는 바람이 우릴 가로막았다. 오르막, 내리막을 전전하며 이백의 우리는 걸었다. 쟁하게 내리던 빛줄기는 어느새 구름에 몸을 감췄고, 뿌연 하늘에 짙은 구름 만이 둥실거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토해낼 거 같던 대기는 연거푸 한숨만 쉬어댔다.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차가운 한숨을 걷어내며 걸었다.​바닥에 깔린 자갈도, 흙도, 때때로 밟히는 검은 아스팔트마저 처음 뵈는 것들이었다. 어느 날부터 하늘과 땅은 쳐다도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러나 목적지도 없는 무수한 발걸음들은 결국 고개를 떨구거나 높게 치켜들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가 자락에서 그렇게 걸었다.​하늘은 비었고, 땅은 과묵했다. 검은 어둠 속에서 빨라지..
[내무반에세이]"인지" 형광등에 흐르던 전류가 멈추고 빛을 잃은 자리에 누웠다. 벽에서 들어오는 시린 기운을 피해 이불을 둘러냈다. 눈을 감고, 하루 중 부끄러움과 뿌듯함 거기서 파생된 무수의 생각들을 억누르며 잠을 청했다. 점점 사고의 흐름이 느려지고, 점점 의식을 놓아가는데 얼굴에 붙은 두 개의 구가 느껴졌다. 온종일 빛을 받아 머릿속에 색을 넣어주던 구 한 쌍은 얇은 가림막 아래서 뒤척이기 시작했다.​잠들기 직전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쇄 반응으로 혀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침을 삼켜야 하는지, 폐 속에 공기를 계속 집어넣는 것마저 신경이 쓰였다. 이미 졸린 기운은 멀리 달아났다.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해오던 것들이었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나서는 잠에 들지 ..
[내무반에세이]"찻잔 속의 태풍" 아파하는 사람들의 비명과 울분이 들린다. 저 먼바다 어딘가에서 시작된 작은 바람이 몸집을 키우듯. 그 외침들이 모여 우리나라에 상륙하고 있다. 멀고 먼 곳을 돌아 겨우 도착했다.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누군가는 이름을 붙이고, 누군가는 욕을 하고, 누군가는 문을 닫고, 누군가의 누군가 들만 태풍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중 누군가만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인다.​우리는 태풍 속에 살고 있다. 자유로운 나비의 날갯짓에 작은 '바람'들이 모여 거대한 태풍을 만들었다. 몰아치는 바람에 검은 비구름도 앞장서 동참했다. 그동안 무심코 버렸던 쓰레기들이, 장난으로 치부했던 웃음들이. 무감각한 도덕들이 강한 상승기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필연적으로 불어올 바람이었을 것이다. 천천히 지구를 잠식하는..
[내무반에세이]"도피" 꿈이 선명하다. 밤새 뇌리를 스친 몇 초의 생각들이 마치 오랜 시간처럼 빛을 발했다. 현실의 딱딱함이 허리로 전해지고, 차가운 공기가 코 끝에 서려도 그 빛을 떠올린다. 찰나의 기억들을 더듬어 다시 풀어낸다. 언어 차원의 것이 아니었지만 떠올리고 생각하고, 그려내 문자로 정리한다. 꿈을 기억한다. 검은 안개로 뿌옇기만 했던 망상의 가시화는 갈수록 맑아졌다. 때론 눈을 뜬 세상보다 더 살아있음을 느낀다.​꿈은 우리 안에 박힌 수많은 기억과 상상의 파편들이 무작위로 뭉쳐진 덩어리다. 이 덩어리는 순식간에 다시 부서져 새롭게 뭉쳐진다. 그 연속의 과정으로 우리는 꿈을 꾼다. 게다가 이 과정은 단 몇 초 안에 일어나고 있다. 부조화 덩어리, 찰나의 시간. 꿈이 장시간 머릿속에 머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내무반에세이]"과거와 지금, 미래" 내가 썼던 글을 읽었다. 내가 이런 글을 썼었나? 낯선 감정과 생각들이 꽤나 보기 좋은 문장으로 담겨 있었다. 지금 나는 이런 글을 쓰지 못하는데. 조금은 부끄러웠다. 모두가 나아가는 시기에 나는 다시 퇴화하고 있는 건가. 이 글을 쓸 때로 돌아가고 싶다. 살아가다 한 번은 뒤를 돌아보며 찬란하게 남아있는 흔적들을 보며 그때로의 회귀를 말하곤 한다. 그때가 좋았지. 지금은 예전만 못하네.​그 글을 쓸 당시와 지금의 나는 놓인 상황, 삶을 대하는 태도, 무엇 하나 같은 게 없다. 그때의 나는 어떤 길 위에 서있었나. 사방팔방으로 놓인 수천만 갈래의 갈림길 앞이었다. 어떤 길로 나아가던 계속해서 똑같은 갈림길을 만났을 것이다. 결코 정도라는 것은 없으며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도 없었다. 우리 모두가 다른 ..
[내무반에세이]"서늘함으로 찬란함을" 난생 처음 만져 본 총구의 온도는 서늘했다. 강철의 차가움이 손 끝에 번지자 소름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 차가운 총구가 누군가에게 향하는 상상. 방아쇠를 당기자 화약의 폭발로 굉음과 함께 뜨겁게 달아오른 총구에서 금빛 총알이 튀어내와 그 사람의 몸 속 깊숙히 박히는 모습이 그려졌다. 흠칫 놀라 총구에 닿았던 손을 얼른 떼버렸다.​지금 내가 여기서 배우는 것들은 쟉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는 법, 그리고 적을 성공적으로 섬멸하는 방법이다. 소총을 다루고, 수류탄을 던지고, 힘을 기르고. 미래의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실상 생애 경험해보기는 힘들겠지만 전쟁이 나버렸을 때 내가 해야할 일은 이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적을 죽이는 것 아닐까. 나라를, 국민을, 단순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들을 지키기 위..
[내무반에세이]"겨우 풀" 아침 내 쌓인 눈이 녹고,짙은 분위기 속. 고개 숙인 너를 봤다.초록을 놓지 못한 채 눈바람을 맞은 너를.이파리로 내려 앉은 눈송이를 털어내지 못해서연한 너의 줄기로는 견뎌내기 힘들었을 테지.​고맙다.고개가 꺾일 지언정 흙을 움켜 쥔뿌리만은 놓지 않아주어서너를 묶어놓은 뿌리였음에도스스로 흙을 포기하지 않아 고맙다.​겨우 내 누렇게 눈을 감은 잔디 사이에서초록빛 너를 봤다.겨우 안도의 한숨인지후회의 탄식인지를 뱉어내는너를 기억했다.
[내무반에세이]"별빛 가득한 특별한 밤하늘" 여기는 유난히 별이 많다. 모두는 어두컴컴해진 밤하늘과 자잘하게 흩뿌려진 별무리에 눈을 반짝인다. 여기는 별이 진짜 많네. 낯선 풍경이었다. 인구 1000명도 안되는 작은 면 단위 안에 다 소수가 모인 마을의 하늘에는 항상 별빛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옛날보다 별이 안보여서 놀란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 맑은 날에는 검은 우주에 우윳빛 줄기가 쭉 뻗어 있었다는 이야기. 갈수록 별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쉽다는 그 분들의 모습은 별이 많다고 행복해하는 주변 친구들의 모습과는 제법 달라보였다.​밤이 찾아오고 별이 뜨는 것이 당연한 시절든 지났다. 간간이 보이는 밤하늘의 빛이라고는 빠르게 이동하는 항공기 불빛 뿐인 오늘이 왔다. 우리에게 있어 별은 원체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길거리 네온으로 우리가 수많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