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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에세이]"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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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선명하다. 밤새 뇌리를 스친 몇 초의 생각들이 마치 오랜 시간처럼 빛을 발했다. 현실의 딱딱함이 허리로 전해지고, 차가운 공기가 코 끝에 서려도 그 빛을 떠올린다. 찰나의 기억들을 더듬어 다시 풀어낸다. 언어 차원의 것이 아니었지만 떠올리고 생각하고, 그려내 문자로 정리한다. 꿈을 기억한다. 검은 안개로 뿌옇기만 했던 망상의 가시화는 갈수록 맑아졌다. 때론 눈을 뜬 세상보다 더 살아있음을 느낀다.

꿈은 우리 안에 박힌 수많은 기억과 상상의 파편들이 무작위로 뭉쳐진 덩어리다. 이 덩어리는 순식간에 다시 부서져 새롭게 뭉쳐진다. 그 연속의 과정으로 우리는 꿈을 꾼다. 게다가 이 과정은 단 몇 초 안에 일어나고 있다. 부조화 덩어리, 찰나의 시간. 꿈이 장시간 머릿속에 머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도 꿈을 되짚는 과정에 새로운 생각들이 침투하므로 온전히 자신의 꿈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꿈이 갈수록 더 선명하게 자신이 있었음을 각인시키고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3차원이 뚜렷해지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현실의 부정이다. 과거의 기억을 스크린에 상영하듯 그래도 재현되는 꿈은 꿔 본 적이 없다. 어느 하나라도 다른 것이 첨가되기 마련이다. 무의식 속에서 당시의 상황들을 재조립하는 거다.

그렇게 만들어진 꿈은 대개 자신이 원하든 아니든, 현실에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다. 현실에 결여된 모습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꿈이 선명해진다는 것은 현실에서의 도피를 의미하기도 한다. 잠이 과도하게 많아지는 과정의 원인 중 하나로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꼽기도 한다. 이처럼 상상하고 꿈을 꾸는 행위는 지금 본인이 놓인 현실에 어떠한 종류의 결핍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꿈이 선명하다. 선명한 꿈은 영감이 되어 새로운 옷을 입기도 하지만, 때때로 선명한 꿈은 현실을 흐리게 만든다. 결핍된 무언가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채워진 곳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꿈에 대한 기억은 현실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금 나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왜 본능적으로 의식 속 도피를 행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단순 도피에서 끝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 없이 재조합 만으로 새로운 기억을 만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항상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리고 꿈은 그 경험의 범위를 한층 넓힌다. 그렇기에 하나의 기회로 하나의 가능성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 탄생시킨 내 안의 도피처. 매일 매 순간 모습을 달리하는 꿈. 아침에 눈을 뜨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전 생각을 정리하고 의지를 다지는 내 안의 케렌시아. 그 안에서 탄생하는 것은 투우장의 새로운 챔피언이 될지도 모른다. 남들은 평생에 경험해보지 못할 것들을 겪는 순간이다.

꿈을 꾸는 것도, 꿈을 기억하는 것도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의 경험과 기억은 불현듯 그럴싸한 번뜩임을 보여주기도 하니까. 특히 가상의 이야기를 써내는 게 취미인 나로서는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도피는, 결핍은, 창조와 발전의 시발점이다. 투우장의 소가 뿔을 앞으로 하고 달려나갈 준비를 하는 곳, 케렌시아. 꿈은 우리에게 그런 역할을 우수히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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