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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에세이]"목적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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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에세이]"목적지에 대해"

걸었다. 어깻죽지 위에서는 묵직한 짐 꾸러미가 발바닥의 마찰을 더했다. 앞에는 볼을 애며 지나는 바람이 우릴 가로막았다. 오르막, 내리막을 전전하며 이백의 우리는 걸었다. 쟁하게 내리던 빛줄기는 어느새 구름에 몸을 감췄고, 뿌연 하늘에 짙은 구름 만이 둥실거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토해낼 거 같던 대기는 연거푸 한숨만 쉬어댔다.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차가운 한숨을 걷어내며 걸었다.

바닥에 깔린 자갈도, 흙도, 때때로 밟히는 검은 아스팔트마저 처음 뵈는 것들이었다. 어느 날부터 하늘과 땅은 쳐다도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러나 목적지도 없는 무수한 발걸음들은 결국 고개를 떨구거나 높게 치켜들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가 자락에서 그렇게 걸었다.

하늘은 비었고, 땅은 과묵했다. 검은 어둠 속에서 빨라지는 발, 목적지에 대한 무지는 되려 걸음에 힘을 더했다. 목적지를 모르는 우리는 비었고, 과묵했지만 걸어야만 했다. 걸을 수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곳까지의 여정은 어떤 아쉬움도 기대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걸었다. 터벅거리며 제 할 일을 하는 발 위에는 어떤 부담도 강박도 없었다.

반환점에 도착했다. 돌아갈 길이 보였다. 우리는 앞을 보기 시작했다. 과목과 공백은 이내 기대와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구름 뒤 어스름한 해는 묵묵히 서향으로 넘고 있었다. 걷는 것은 힘들었다. 질질 끌리는 발이 조급했고, 답답했다. 빨라지지 않고 자꾸만 무거워지는 두 다리를 책망했다.

목적지를 안 우리는 걷지 못했다. 걸었지만 걸을 수 없었다. 가늠과 앎은 앞을 보는 우리에게 힘을 빼앗았다. 좀처럼 시원하게 달려나가지 못하고, 마음처럼 시간의 흐름을 달리하지 못하니 몸은 육중한 닻이 되어 점점 가라앉았다.

어디에 언제까지 도착하겠노라는 목표는 때로 여정을 방해한다. 걸어야만 한다면, 걸을 것이라면 짙은 어둠 속이 차라리 낫다. 조바심과 고대함은 잠시 걸음을 재촉할 순 있으나 꾸준히 걷는 것에 적당한 것들이 아니었다.

목적지에 다다라갈수록 조급함과 느린 발걸음 사이의 괴리가 몸집을 키웠다. 발바닥의 통증도, 어깨 위에 짓눌림도, 몸집을 키운 괴리에 비할게 못되었다. 그렇기에 어디까지 가겠다는 명확한 X 표시를 찍을 필요는 없다. 분명 목적 없는 여정은 불안하고 두렵겠지만 계속 걸을 수 있다. 방향만 기억한다면 예상치 못한 길 위의 정경에 보상을 받으며 계속 걸을 수 있다. 조급과 조바가 없는 길 위에는 뜻밖의 의미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단거리의 목표는 걸음에 유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네 삶처럼 기나긴 걸음을 시작했다면 목적지 정도는 모르고 걷는 게 낫다. 걸음에 무언갈 바라기 보다, 그저 걷게 되니까. 가늠치 못하기에 더 쉬어갈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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