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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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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에세이]"서늘함으로 찬란함을" 난생 처음 만져 본 총구의 온도는 서늘했다. 강철의 차가움이 손 끝에 번지자 소름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 차가운 총구가 누군가에게 향하는 상상. 방아쇠를 당기자 화약의 폭발로 굉음과 함께 뜨겁게 달아오른 총구에서 금빛 총알이 튀어내와 그 사람의 몸 속 깊숙히 박히는 모습이 그려졌다. 흠칫 놀라 총구에 닿았던 손을 얼른 떼버렸다.​지금 내가 여기서 배우는 것들은 쟉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는 법, 그리고 적을 성공적으로 섬멸하는 방법이다. 소총을 다루고, 수류탄을 던지고, 힘을 기르고. 미래의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실상 생애 경험해보기는 힘들겠지만 전쟁이 나버렸을 때 내가 해야할 일은 이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적을 죽이는 것 아닐까. 나라를, 국민을, 단순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들을 지키기 위..
[내무반에세이]"겨우 풀" 아침 내 쌓인 눈이 녹고,짙은 분위기 속. 고개 숙인 너를 봤다.초록을 놓지 못한 채 눈바람을 맞은 너를.이파리로 내려 앉은 눈송이를 털어내지 못해서연한 너의 줄기로는 견뎌내기 힘들었을 테지.​고맙다.고개가 꺾일 지언정 흙을 움켜 쥔뿌리만은 놓지 않아주어서너를 묶어놓은 뿌리였음에도스스로 흙을 포기하지 않아 고맙다.​겨우 내 누렇게 눈을 감은 잔디 사이에서초록빛 너를 봤다.겨우 안도의 한숨인지후회의 탄식인지를 뱉어내는너를 기억했다.
[내무반에세이]"별빛 가득한 특별한 밤하늘" 여기는 유난히 별이 많다. 모두는 어두컴컴해진 밤하늘과 자잘하게 흩뿌려진 별무리에 눈을 반짝인다. 여기는 별이 진짜 많네. 낯선 풍경이었다. 인구 1000명도 안되는 작은 면 단위 안에 다 소수가 모인 마을의 하늘에는 항상 별빛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옛날보다 별이 안보여서 놀란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 맑은 날에는 검은 우주에 우윳빛 줄기가 쭉 뻗어 있었다는 이야기. 갈수록 별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쉽다는 그 분들의 모습은 별이 많다고 행복해하는 주변 친구들의 모습과는 제법 달라보였다.​밤이 찾아오고 별이 뜨는 것이 당연한 시절든 지났다. 간간이 보이는 밤하늘의 빛이라고는 빠르게 이동하는 항공기 불빛 뿐인 오늘이 왔다. 우리에게 있어 별은 원체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길거리 네온으로 우리가 수많은 ..
[내무반에세이]"달린다는 것" 마른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한걸음 뻗어냈다. 다리가 뭉쳐오고, 힘은 발바닥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부족해진 몸속 산소 탓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그래도 달렸다. 점점 다가오는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렸다. 힘들고 아프다는 느낌 위에는 알 수 없는 희열이 덧씌워졌다.​달린다는 것은, 달리는 순간은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극에 달한 상태다. 달리기 이전에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피했으며, 무엇을 좇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도착해야 하는 하나의 목표만을 갈망하는 순간이다. 지각하지 않기 위해 혹은 커다란 기대감에, 그리고 도망치기 위해. 모든 상황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 속에 놓인 이들은 모두 달린다. 숨 가쁘게 앞을 향해 나아간다.​헐떡이는 만큼 가까워오는 목적지를 기대할 수 있어..
[내무반에세이]"편지에 담긴 것들" 누구나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 안에 많은 것을 담게 된다. 평소 말로 잘 하지 못했던 것들. 더 깊은 내면의 감정 등등의 것들이다. 편지 안에는 말보다 메신저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담게 된다. 그 이유로는 비대면적 의사소통 수단이라는 점. 실시간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 작성하는 데 오래 걸린다는 점과 같은 것들이 있겠지만, 애초에 편지를 쓰는 동기 자체가 특별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요즘의 내가 쓰고 있는 편지는 조금 다르다. 매일매일 편지를 쓰고 있고, 그 안에는 그 사람과 나의 자유로운 의사소통로가 단절된 상태기에 더 많은 것을 담게 된다. 자유를 품었던 시절에는 언제든 만나려고 하면 만날 수 있었고, 메신저를 주고받거나, SNS를 들여 보거나 전화를 하는 등, 언제나 오감으로 서로를 ..
[에세이]"세포가 되었다." 우리의 몸은 셀 수 없이 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 다세포 생물이라고 한다. 모든 세포는 생명체의 일원으로서 생명의 지속을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그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새겨진 일들을 해나간다. 그러다 자칫 이상한 행동을 하는 세포나 제 기능을 못하는 세포는 이내 죽거나 다른 형태의 질환으로 변모한다. 수많은 세포들의 노고와 죽음으로 생명을 영위하던 다세포 생물 '나'는 이곳에 들어와 하나의 세포가 되었다.​머리가 지시하는 데로 제자리를 찾고, 제 역할을 수행한다. 체계는 정확해야 하고, 세균 같은 존재는 백혈구가 나서 저지한다. 제 위치를 벗어나선 안되고, 이상행동을 해서도 안된다. 그저 내가 속한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 묵묵히 시키는 행동을 한다. 수십억의 자율성을 희생시켜 ..
[에세이] "기다리지 못했던 우리에게" 기다린다는 감정, 요즘의 사회에는 존재하기 힘든 감정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식당에 줄 서있는 사람들.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은 단어뿐인 기다림을 하고 있다. 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멈춘 후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기 마련이다.​사람들은 기다림을 싫어한다. 싫어해왔다. 그래서 쉼 없이 눈과 입을 굴린다. 과거에는 신문의 형태로, 대화로,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시대를 통틀어 수면이라는 선택지도 있다. 나도 어딘가로 이동하는 기차 안이나 무언가를 기다릴 때면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날 업로드된 웹툰을 보기 시작했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SNS 글들을 읽었다.​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기 바빠..
[에세이]모든 게 같아지는 순간 모두의 다름이 보였다 같은 머리를 한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같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같은 전달 사항을 받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침구를 깔고 같은 시간에 잠을 잔다. 개개인의 몸뚱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획일화된다. 그런 우리는 모두 같아 보이게 행동한다. 그렇게 같아져만 간다.​그러나 모든 것이 같아지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모두는 달라 보였다. 눈에 띄는 다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작은 다름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앉아있는 동안 누군가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이리저리 눈을 굴렸고, 누군가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수첩을 꺼내 무언갈 끄적였고, 누군가는 자신의 옷을 만지며 시간을 보냈다.​서로가 달랐던, 달라 보였던 때는 그러한 다름보다는 누가 같은 옷을 입고,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