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린다는 감정, 요즘의 사회에는 존재하기 힘든 감정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식당에 줄 서있는 사람들.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은 단어뿐인 기다림을 하고 있다. 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멈춘 후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기다림을 싫어한다. 싫어해왔다. 그래서 쉼 없이 눈과 입을 굴린다. 과거에는 신문의 형태로, 대화로,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시대를 통틀어 수면이라는 선택지도 있다. 나도 어딘가로 이동하는 기차 안이나 무언가를 기다릴 때면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날 업로드된 웹툰을 보기 시작했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SNS 글들을 읽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기 바빠 기다림이라는 감정, 행위를 잃어버렸다. 기다림의 시간 속에 수많은 시작들을 욱여넣으면서 더 빠른 폰, 더 빠른 인터넷을 추구하며.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기다림이라는 행위에 당도했다. 어떤 움직임도, 또 다른 시작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오자 당황스러웠다. 멈춰 있는 손과 발 그리고 머리까지. 무수한 시작들로 보냈던 찰나의 시간들은 사방으로 팽창하여 분초 단위로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게 온전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5분, 10분의 기다림은 웹툰 두 편, 유튜브 영상 하나가 아니었다. 수천 번 눈을 깜빡이고, 수백 번 침을 삼켜야 하는 시간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이내 새로운 무언가가 안에서 피어났다. 그리고 시야가 넓어졌다. 평소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시신경을 자각했다. 옆 사람의 움직임, 주변의 사물들, 시각의 확장은 곧이어 청각, 촉각의 확장으로 번졌다. 들리지 않았던 공간의 소음, 느껴지지 않았던 옷깃의 촉감, 기다림은 감각의 확장이 되었다.
수많은 입력값들이 쏟아지자 이와 비례하여 산출 값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소음에 대한 상상, 옷깃의 감촉에 대한 감상, 낯선 사물에 대한 인상. 기다리지 않았던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이다. 비록 강제에 의한 기다림이었으나. 안에서 피어나는 것들은 충분히 자유로웠다.
앞으로 직면할 기다림 들을 대하는 자세가 조금 달라질 거 같다. 지루했던 수천 번의 깜빡임이 수백 번의 목 넘김이 수만 가지의 생각으로 바뀌었다. 더 많은 것들로 파생될 소중한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