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연극과 같다"
-어빙 고프면 [자아 연출의 사회학]-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어떤 역할을 부여받는다. 누군가의 자식, 어떤 부부의 아이, 어떻게 생긴 아기, 그 첫인상과 더불어 앞으로 해나가야 할 배역의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이 정해진다. '기대'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살고 있다. 물론 처음 부여받는 배역은 자신에게 '기대'를 보내는 사람들 즉,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변형되고 달라진다.
우리는 그 기대들과 관중들의 반응을 통해 배역을 완벽히 수행해내야 한다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 어느 조직에서 착하고 유능하다는 역할에 당첨된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기를 은연중에 강요받는 것처럼. 그 강요에 의해 연기를 하면 결과적으로 그 배역에 걸리는 기대가 늘어나 연기 분량이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지속될수록 더욱 강화된 배역이 비로소 한 사람의 정체성으로 굳는다.
우리 삶에서 타인에 의해 ㅁ반들어진 배역에 갑갑함을 느끼는 이들은 당당하게, 혹은 전투적으로 더 이상 연극에 놀아나지 않겠노라며 무대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무대 아래에도, 어디에나 우리는 관중들에게 둘러싸인다. 관중이 있는 곳에서는 또다시 연극이 벌어진다. 메이저 무대에서 내려온 이들은 큰 기대를 저버렸다는 이류로 안티가 생기고,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멸시를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소위 반동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기를 기대받는다.
결국 탈출은 없었다. 산속에 잠적해서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아니 서로는 서로의 관중이 되어, 각자의 역할에 서로를 옭아맨다. 이 무차별적이고 난장인 연극은 왜 계속 유지되고 있는가. 어쩌면 무언가 기대하고 자신이 바라는 모습만을 보기를 원하는 것. 그런 이기적인 본능이 우리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를 존중한다. 네가 무엇을 하든 괜찮다. 그러나 그 말 뒤에는 분명 상대가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모습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잘못도, 악행도 아니다. 관심과 호불호가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서 기대와 바람은, '역할 부여'는 사라질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의 호를 얻고 싶으면 결국 연극에 필히 동참해야 하고, 불호를 얻더라도 연극에서의 악당 혹은 부적응자 따위의 배역을 부여받게 된다.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이상, 이 연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의사 표현과 각자의 감정 표출.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자신 얼굴 위에 쓰일 가면이다.
자신의 얼굴이 뭔지 찾을 수 없게 된 비참한 무대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사실상 완전히 커튼콜을 선언하며 연극의 종지부를 찍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관중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할지도 모른다. '강요'하는 관중을 없애야 한다. 모두가 원하는 자신의 배역을 찾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환호를 보내는 것.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무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무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배역의 선택이 자유로운 무대, 야유가 없는 무대, 그리고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무대. 어찌 보면 말뿐인 이상주의자가 뱉어내는 헛소리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 허상일지라도 만들어진 목표는 방향을 보여준다. 우리가 굳세게 나아가야 할 방향의 이정표. 관중의 실망과 야유가 무서워 맞지 않는 가면을 쓰는 무대보단 각자가 원하는 옷을 입고, 함께 웃고, 존중을 나누는 무대가 더 생기 있고 자연스럽지 않을까.